[vol.6] 2018 NGI 6월 뉴스레터
2018/07/23 06:50 am
동역자님께 드리는 글
동역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계속되는 무더운 더위에 모두 건강하신지요?
NGI는 동역자님들께 기쁜 소식을 전해 드리게 되어 무척 설레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저희가 그간 꿈꾸며 기도로 준비했던 느헤미야 글로벌 커뮤니티 센터(NGCC)의 개관을 곧 앞두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탈북민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지역 중 하나인 서울시 양천구에 개설되는 NGCC는 5호선 신정역과 2호선 신정네거리역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위치합니다. 8월 중순 입주를 목표로 현재 내부 공사가 한창 진행중에 있습니다.
그간 양재역 부근 장소를 임시로 임대하여 느헤미야커뮤니티센터로 사용하였고, 구로디지털단지에 위치한 사무실을 임대하여 활용하였으나 임대기간이 만료되면서 두 장소를 하나로 합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두 장소 모두 거리상 탈북민 사역을 효과적으로 하기에 적합하지 못하고, 또 비용도 만만치 않아 탈북민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지역에 센터를 열고 오는 8월부터는 사역에 더욱 속도를 내려고 합니다.
NGI의 사역이 시작될 때, 주님께서는 ‘잊혀진 사람들을 기억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서며, 그들의 삶을 회복하고 다시 세우는 일’이 제게 맡기신 사명이라고 하셨습니다. 특별히 2천5백만 북한 주민들과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10 만 탈북민들, 국내에 입국한 3만2천명의 탈북민들에게 버팀목과 울타리가 되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역 초기부터 느헤미야 커뮤니티(공동체)를 만들고 커뮤니티 센터를 세우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여기고 기도로 준비해왔습니다. 그러던 지난 5월, 이 비전을 나누며 ‘느헤미야 커뮤니티 빌더(builder)가 되어 주세요’라는 호소에 익명의 분들이 동참해 주시면서 센터 건립 준비가 시작 되었습니다.
NGCC는 ‘함께 꿈을 꾸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탈북민들만의 꿈이 아니라 남, 북, 해외동포, 글로벌 커뮤니티 모두의 꿈, 무엇보다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가는 공간이 될 것을 믿습니다. NGCC에서 영어 교실, 컴퓨터 교실, 음악 교실(탈북청소년 예배자 학교)이 열리며, 개인 상담과 그룹 상담 과정이 시작되고, 사랑방 모임 ‘Re’를 통해 탈북민들이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고 주님의 임재와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NGCC가 탈북민들이 언제든지 부담없이 찾아올 수 있는 친정집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NGI는 이 일에 함께하실 ‘느헤미야 3000빌더(Nehemiah 3000 Builder)’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소외되고 잊혀진 탈북민들과 북한 주민들에게 힘과 용기가 되어주고, 그들이 통일된 대한민국의 주역이 되도록 힘쓰는 공동체에 여러분을 초청합니다. 기도로, 후원으로, 자원봉사로 함께 섬겨 주세요. 탈북민들이 구출되고, 회복되며, 다시 세워져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며, 부흥을 경험하여,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감당하게 될 그 날을 함께 준비하길 원합니다.
여러분의 작은 정성이 기적을 만들어갑니다.
느헤미야 3000 빌더가 되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케네스배 드림
NGI소식
느헤미야100만기도서명운동&느헤미야기도회
지난 6월 말 기준, 전세계 1,776명(28개국, 365개 도시)이 2,500만 북한주민을 위해 함께 기도하기 위해 『느헤미야 100만 기도서명운동(pray4nk.org)』에 참여해주셨습니다. 6월 한달 동안도 서명에 동참해주시고 북한 주민을 위해 기도해주셔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가족, 친구 중 아직 기도서명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분이 있다면 지속적으로 권유해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여전히 하루 세 끼 쌀밥을 먹는 것이 어렵고, 신앙의 자유가 없어 마음껏 기도하고 찬양할 수 없는 북한형제자매들은 우리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매주 화요일 저녁마다 열리는 느헤미야기도회에서는 6월 한달동안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 북한 주민이 겪고 있는 두려움의 고통을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 등을 통해 북한주민의 인권이 보장되어 신앙의 자유함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 우리가 통일을 위해 준비할 것은 더 많은 재정을 일으키거나, 더 많은 교회를 세우거나, 더 많은 일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죄악으로부터 우리를 더욱 깨끗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오늘 내가 하루 1분을 기도하면 전세계 1,776분(약 30시간)의 기도가 모입니다. 이는 Pray4nk.org에 1,776명이 기도하기로 서약하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 기도가 매일같이 쌓이고 쌓여 때가 되면 북한의 저 단단했던 장벽이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 없는 슬픔의 땅이 자유를 얻고 기쁨으로 넘치게 될 것입니다. 북한의 문이 열려 우리가 쉽게 왕래할 수 있는 그 날이 되면 북한 땅으로 가서 "우리가 당신들의 자유를 위해 기도했습니다."라고 기쁨으로 그들을 끌어안길 소망합니다.
■ 기도서명하기
http://pray4nk.org/kor/sign
매주 화요일 저녁 7시 30분마다 한 자리에 모여 북한주민들을 위한 기도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바로 <느헤미야기도회>입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시길 원하는 동역자분들은 기도회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장소와 문의는 아래 사이트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느헤미야기도회 참여 안내 (매주 화요일 저녁 7시 30분)
http://pray4nk.org/kor/prayer-gathering
느헤미야 북한선교아카데미
지난 6월에 진행된 마지막 2주차 강의는 비즈니스선교 모델 운영을 통해 국내외 탈북난민ㆍ탈북민의 재정을 돕고 그들의 신앙성장을 위해 예배모임과 학교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고 있는 두 개의 선교단체 대표를 초청하여 현장 사역을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국내외 탈북난민ㆍ탈북민을 위한 현장에서의 실질적인 사역들에 대해 나눠 들음으로써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역을 펼쳐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배울 수 있었습니다.
총12회차로 진행된 제1기 느헤미야 북한선교아카데미는 3월 24일에 개강하여 6월 16일부로 종강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날 오후에 진행된 수료식에서는 학생 김유나 님의 플루트연주와 소프라노 박선덕 님의 찬양독주 등 감동적인 축하무대가 있었습니다.
아카데미를 수료한 학생들은 "내 마음이 하나님 앞에 회복되는 시간이었다”며 “북한선교에 대해 구체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며 소감을 전했습니다. 또한 "북한의 사정이나 우리 민족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있었고 이제는 기도할 때면 자연스럽게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된다"며 "관심 있는 교육의 영역에 있어 더 전문적으로 배워서 탈북민들을 돕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이번 아카데미를 수료한 학생들에게 북한주민과 국내외 탈북민을 위해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열정과 비전을 가지고 힘찬 발걸음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한편 5월 중순에는 사역체험의 일환으로 서해 바다에 직접 가서 바다물길을 통해 북한주민들에게 쌀과 성경을 보내는 사역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느헤미야 북한선교아카데미는 탈북민들과 북한주민을 섬기기 위한 통일 선교사를 양성하기 위한 프로그램입니다. 이번 아카데미를 통해 학생들 모두 끝까지 최선을 다해 북한을 향한 주님의 마음과 뜻을 온전히 깨달아 각자의 분야에서 실천적인 섬김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북한주민직접돕기
쌀과 성경을 보내는 바닷길프로젝트
쌀과 성경을 보내는 바닷길프로젝트
북한에는 여전히 식량난에 허덕이는 75만명이 있습니다. 북한주민들에게 쌀과 성경을 보내고 싶으신가요? '바닷길프로젝트'에 참여해주세요. 소그룹, 교회, 단체 등 원하시는 분들이 함께 정성을 모아 그들에게 희망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Q. 통 안에는 어떤 내용물을 넣어서 보낼 수 있나요?
- 참여하신 분들이 원하시는 어떤 것이든지 넣어서 보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쌀, 성경, 1달러, 손 편지를 보냅니다.
Q. 왜 쌀, 성경, 1달러, 손 편지를 보내는 건가요?
- 쌀은 육적인 공급으로 9끼 정도의 분량으로 3일치의 식량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 성경은 영적인 공급으로 북한 주민이 성경을 하나님을 만나기를 소망하며 보냅니다. - 1달러는 북한에서 쌀 1.5kg을 직접 구입 가능한 금액으로 그들의 식량해결을 위한 것입니다. - 손 편지는 우리의 사랑을 정성스런 글귀로 그들에게 희망을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Q. 내용물을 담을 통(페트병)을 후원자들이 직접 가져와야 하나요?
- 아닙니다. 통은 NGI의 바닷길프로젝트를 위해 직접 제작된 통을 사용합니다.
Q. 내용물과 통 한 개는 얼마의 비용이 드나요?
- 한 통을 보내는 데 1만원이 듭니다. (제작된 통, 쌀, 성경, 1달러, 손편지, 운반비 등)
Q. 보낼 통을 만드는 작업은 후원자가 직접 참여할 수 있나요?
- 물론 가능합니다. NGI의 담당 간사가 함께 후원하신 팀에서 통에 내용물을 직접 담고 작업할 수 있도록 도와드립니다. 재정만 지원해서 진행하실 경우 통 작업은 NGI의 간사들과 봉사자들이 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작업 후에 통을 차량으로 이동하여 바닷길에 보내는 사역에도 함께 동참하실 수 있습니다.
기타 궁금하신 사항과 바닷길프로젝트에 참여를 원하시는 분은 NGI 사역본부 로 연락 부탁 드립니다. (02-363-8488/[email protected])
느헤미야영어통일캠프 NERC
오는 7월 29일, ‘2018 느헤미야 영어통일캠프’가 6박 7일간 제주도에서 개최됩니다.
‘Return to God, Return to One Korea’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캠프는 남과 북, 해외동포들, 원어민들이 함께 모여 통일을 기원하는 축제의 장을 열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꿈과 소망을 이루어 나가는 일을 미리 경험하는 귀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한반도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하나 된 대한민국으로 회복되고, 세워져서, 복음 통일, 부흥 한국을 이루고, 고통받는 2,500만의 북한주민들에게 하나님 말씀이 전파되는 날이 하루 속히 오길 소원합니다. 탈북청소년들과 남한과 해외의 젊은이들이 하나가 되고, 치유와 회복을 경험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혹시 자원봉사자로 섬겨 주시거나 자녀들을 캠프에 보내주실 분들은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NERC 사무국(070-7726-8802)으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NGI INTERVIEW 지금 만나러갑니다 _ 탈북민 이지현
대상 : 이지현(가명), 35세, 양강도 혜산 보천군 출신
북한을 탈출해서 중국에서 살면서 가장 힘든 점으로 신분이 없었던 것을 말하는 그녀… 지금 가장 바라는 것은 하루 빨리 떨어져있는 남북이산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것. 남한에 온 지 8개월 차인 탈북민 이지현 (가명, 35세)님을 만났습니다.
Q. 탈북하기 전 북한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A.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을 겪을 당시 아버지가 러시아에서 벌목으로 많이 벌어오시던 때여서 저희 집 생활은 어렵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후 어머니가 1년정도 병을 앓다가 돌아가셨는데 그때부터 저희 집 생활이 어려워지기 시작했어요. 아침, 점심을 겨우 먹고 저녁 먹을 끼니가 없을 정도로 어려웠어요.
Q. 끼니를 걱정한다는 것이 남한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데요. 어느 정도였는지 설명해 줄 수 있나요?
A. 하루에 두 끼를 먹으면 많이 먹는 건데, 그 두 끼 마저도 남한에서 생각하는 정상적인 식사가 아니에요. 쌀은 당연히 못 먹고, 강냉이 국수 1kg을 사서 이틀을 살 수 있었어요. 강냉이 국수를 물에 많이 불려서 죽을 써먹었는데 그래야 양이 많아지거든요. 그런 죽을 하루 두 끼 밖에 못 먹었던 거예요. 아버지와 지내면서 장사를 해보려고 바다 근처에 나가서 미역을 가져다가 시내 장마당에 가져다 팔고 그랬어요.
Q. 고난의 행군 시절에는 북한에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고 알고 있어요. 그렇게 죽은 사람을 직접 본적이 있나요?
A. 시체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못 먹어서) 걷기도 힘들어서 장마당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은 많이 봤죠. 그 중에 허약병에 걸린 어린아이들도 많았어요. 엄마가 집을 나가거나, 아빠는 죽었다던가 아니면 엄마, 아빠가 영양 실조에 걸려서 죽었다던가하는 아이들이 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그랬어요. 어느 날은 제가 청진역에서 기차를 타려고 하는데 한 구석에 있는 애들 둘이 있었어요. 남매였어요. 오빠로 보이는 남자애가 영양실조로 뼈밖에 안 남은 동생을 업고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구걸하고 있었죠. 여자 아이가 골격은 컸는데 살이 하나도 없어서 마치 시체 같았어요. 한국에 와서 보니까 TV에 가난한 아프리카 아이들이 종종 나오는데 그들과 비교했을 때도 그 아이는 더 심각했어요. 아까 물어보실 때 그 아이들이 떠올라서 울컥했어요. 그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때 내가 도와줬어야 했는데 못 도와 줘서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들어요. 그 남매를 본지 15년이 넘는데 아직도 그때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계속 눈물이 나네요.
Q. 언제 북한을 탈출했나요? 그리고 탈북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이런 배고픔이나 가난 때문이었나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나요?
A. 22살때 탈북을 해서 중국으로 갔어요. 가난이나 배고픔보다도 개인적으로 북한생활이 답답하고 많이 힘들어서 '언제까지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는 마음이 들어 북한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했어요. 북한이 정당하지 못한 사회를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시위를 할 수 없었어요. 결국 그 땅을 떠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혼자만의 시위였어요. 그 땅을 떠나 자유가 있는 땅으로 가고 싶었어요. 중국도 자유로운 곳은 아니지만 북한보다는 나으니까요.
Q. 방금 자유 때문에 탈북했다고 했는데 자유가 없는 북한에서 어떻게 자유를 생각하게 되었나요?
A. 보천에서 살아서 중국과 연결이 쉬웠고 주변에서 하는 말도 많이 들어봤기 때문에 자유를 경험하지 못했지만 바깥의 세상이 북한보다 더 자유로운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죠.
Q. 탈북과정에 대해서 이야기 부탁 드릴게요. 탈북과정 전체가 힘들었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 무엇이었나요?
A. 중국으로 가고 싶었지만 가는 방법을 몰랐어요. 그런데 중국에 오가며 밀수를 하는 이모 한 분이 있었는데 그분한테 중국으로 가고 싶다고, 보내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넘어 갈 때가 9월 중순이었어요. 낮에는 경비가 삼엄해서 경비가 느슨해지는 새벽에 강을 넘어야 했어요. 가던 날은 산에 미리 올라가서 온 밤을 산에서 숨어있었어요. 산에 숨어 있으면서 너무 춥고 긴장했던 나머지 구토도 하고 설사도 하고 너무 힘들었지요.
결국 새벽 1시가 되어서 배꼽 정도 높이로 올라온 강을 이모 손을 꼭 붙잡고 넘었어요. 중국으로 넘어가서도 경비가 있어서 잡히면 바로 북송을 당하기때문에 숨조차 쉬지 못할 정도였어요. 그렇게 겨우 이모가 밀수를 하는 곳까지 무사히 도착했어요.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그 다음날 (팔려가는) 중국인 남자 집에서 저를 데리러 왔어요.
북한을 탈출해서 중국에서 살면서 가장 힘든 점으로 신분이 없었던 것을 말하는 그녀… 지금 가장 바라는 것은 하루 빨리 떨어져있는 남북이산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것. 남한에 온 지 8개월 차인 탈북민 이지현 (가명, 35세)님을 만났습니다.
● 탈북하기 전 북한에서의 생활
Q. 탈북하기 전 북한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A.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을 겪을 당시 아버지가 러시아에서 벌목으로 많이 벌어오시던 때여서 저희 집 생활은 어렵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후 어머니가 1년정도 병을 앓다가 돌아가셨는데 그때부터 저희 집 생활이 어려워지기 시작했어요. 아침, 점심을 겨우 먹고 저녁 먹을 끼니가 없을 정도로 어려웠어요.
Q. 끼니를 걱정한다는 것이 남한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데요. 어느 정도였는지 설명해 줄 수 있나요?
A. 하루에 두 끼를 먹으면 많이 먹는 건데, 그 두 끼 마저도 남한에서 생각하는 정상적인 식사가 아니에요. 쌀은 당연히 못 먹고, 강냉이 국수 1kg을 사서 이틀을 살 수 있었어요. 강냉이 국수를 물에 많이 불려서 죽을 써먹었는데 그래야 양이 많아지거든요. 그런 죽을 하루 두 끼 밖에 못 먹었던 거예요. 아버지와 지내면서 장사를 해보려고 바다 근처에 나가서 미역을 가져다가 시내 장마당에 가져다 팔고 그랬어요.
Q. 고난의 행군 시절에는 북한에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고 알고 있어요. 그렇게 죽은 사람을 직접 본적이 있나요?
A. 시체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못 먹어서) 걷기도 힘들어서 장마당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은 많이 봤죠. 그 중에 허약병에 걸린 어린아이들도 많았어요. 엄마가 집을 나가거나, 아빠는 죽었다던가 아니면 엄마, 아빠가 영양 실조에 걸려서 죽었다던가하는 아이들이 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그랬어요. 어느 날은 제가 청진역에서 기차를 타려고 하는데 한 구석에 있는 애들 둘이 있었어요. 남매였어요. 오빠로 보이는 남자애가 영양실조로 뼈밖에 안 남은 동생을 업고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구걸하고 있었죠. 여자 아이가 골격은 컸는데 살이 하나도 없어서 마치 시체 같았어요. 한국에 와서 보니까 TV에 가난한 아프리카 아이들이 종종 나오는데 그들과 비교했을 때도 그 아이는 더 심각했어요. 아까 물어보실 때 그 아이들이 떠올라서 울컥했어요. 그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때 내가 도와줬어야 했는데 못 도와 줘서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들어요. 그 남매를 본지 15년이 넘는데 아직도 그때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계속 눈물이 나네요.
●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건 북한 탈출
Q. 언제 북한을 탈출했나요? 그리고 탈북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이런 배고픔이나 가난 때문이었나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나요?
A. 22살때 탈북을 해서 중국으로 갔어요. 가난이나 배고픔보다도 개인적으로 북한생활이 답답하고 많이 힘들어서 '언제까지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는 마음이 들어 북한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했어요. 북한이 정당하지 못한 사회를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시위를 할 수 없었어요. 결국 그 땅을 떠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혼자만의 시위였어요. 그 땅을 떠나 자유가 있는 땅으로 가고 싶었어요. 중국도 자유로운 곳은 아니지만 북한보다는 나으니까요.
Q. 방금 자유 때문에 탈북했다고 했는데 자유가 없는 북한에서 어떻게 자유를 생각하게 되었나요?
A. 보천에서 살아서 중국과 연결이 쉬웠고 주변에서 하는 말도 많이 들어봤기 때문에 자유를 경험하지 못했지만 바깥의 세상이 북한보다 더 자유로운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죠.
Q. 탈북과정에 대해서 이야기 부탁 드릴게요. 탈북과정 전체가 힘들었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 무엇이었나요?
A. 중국으로 가고 싶었지만 가는 방법을 몰랐어요. 그런데 중국에 오가며 밀수를 하는 이모 한 분이 있었는데 그분한테 중국으로 가고 싶다고, 보내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넘어 갈 때가 9월 중순이었어요. 낮에는 경비가 삼엄해서 경비가 느슨해지는 새벽에 강을 넘어야 했어요. 가던 날은 산에 미리 올라가서 온 밤을 산에서 숨어있었어요. 산에 숨어 있으면서 너무 춥고 긴장했던 나머지 구토도 하고 설사도 하고 너무 힘들었지요.
결국 새벽 1시가 되어서 배꼽 정도 높이로 올라온 강을 이모 손을 꼭 붙잡고 넘었어요. 중국으로 넘어가서도 경비가 있어서 잡히면 바로 북송을 당하기때문에 숨조차 쉬지 못할 정도였어요. 그렇게 겨우 이모가 밀수를 하는 곳까지 무사히 도착했어요.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그 다음날 (팔려가는) 중국인 남자 집에서 저를 데리러 왔어요.
● 중국, 새로운 시작. 그러나 신분 없는 반쪽 자유를 갖고 지낸 12년
Q. 결혼할 남자상대를 선택할 수 있었나요?
A. 내가 원해서 탈북해서 갔지만 남자를 선택할 수는 없었어요. 이모가 밀수 거래처 쪽 사람에게 부탁해서 그 사람이 신랑감을 찾아왔어요.
Q. 지현씨는 여자로써 엄청난 결심을 한 거네요.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시집을 간 거 잖아요? A. 그때 입장은 지금과 전혀 달랐죠. 지금은 한국에 와서 제 가치를 알고 살 수 있고, 모든 것을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지만 그때는 제 가치라는 것이 없었죠. 중국을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과분하다고 여기는 처지였기 때문이었죠.
Q. 남편이라는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느낌은 어땠나요?
A. 남편은 착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다행 중 불행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청각언어장애인이었어요. 당시 남편이 양계장에서 일하면서 그 안에서 살고 있었어요. 자그마한 방이었는데 그렇게 남편하고의 첫 날 밤을 보내게 됐죠.
Q. 남편이 청각언어장애인이라고 했는데 의사소통은 어떻게 했나요?
A. 수화로 했어요. 수화는 남편에게 배웠구요. 남편이 5살 때 병으로 말을 못하기 시작했는데 말을 못한지 오래되어서 상대가 말하는 걸 빨리 눈치채요. 그래서 제가 조금만 수화로 표현해도 금방 말을 알아듣곤 해서 의사소통은 오히려 편하고 쉬웠어요.
Q. 중국에 얼마나 있었고 어떤 게 가장 힘들었나요?
A. 중국에는 한 12년 있었어요.(눈물) 제 기억에는 안 힘들었던 때가 없었던 것 같아요. 제일 힘든 걸 꼽으라면 '신분이 없는 것'이었어요. 경찰차나 경찰이 지나가면 (붙잡혀서 북송될까봐) 무섭고 겁이 났어요. 신분을 숨기면서 살아야 하는 처지여서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조심해야 했어요. 일하다가도 무시를 받아도 무조건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라고 해야 했어요. 그게 정말 답답하고 억울해서 혼자 울고 그랬죠. 그래서 '신분이 있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됐어요. 열심히 일해서 중국호적도 사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게 생각처럼 잘 안됐어요.
제가 한번은 우연히 인터넷을 보다가 북한 사람이 한국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결심을 하고 심양 영사관에 갔어요. 그때 영사관에 가기 전에 아들한테 "엄마는 지금 신분이 없어. 엄마가 신분이 있어야 네 옆에 영원히 있어줄 수 있어"라고 이야기하니까 아들이 제가 왜 이러는지를 이해를 해줬어요. 그런데 가는 중에 아들이 저한테 전화를 걸어와서 "엄마, 그냥 보고만 와"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래 알겠어. 보고만 올게"라고 그랬죠. 막상 가보니까 제가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안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한국영사관에는 중국인 공안들이 보초를 어마어마하게 서고 있더라고요. 붙잡힐까봐 겁이나고 떨려서 가까이도 가지도 못하고 먼데서 한바퀴 돌아보고 그 다음날 집으로 왔어요.
Q. 결혼할 남자상대를 선택할 수 있었나요?
A. 내가 원해서 탈북해서 갔지만 남자를 선택할 수는 없었어요. 이모가 밀수 거래처 쪽 사람에게 부탁해서 그 사람이 신랑감을 찾아왔어요.
Q. 지현씨는 여자로써 엄청난 결심을 한 거네요.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시집을 간 거 잖아요? A. 그때 입장은 지금과 전혀 달랐죠. 지금은 한국에 와서 제 가치를 알고 살 수 있고, 모든 것을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지만 그때는 제 가치라는 것이 없었죠. 중국을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과분하다고 여기는 처지였기 때문이었죠.
Q. 남편이라는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느낌은 어땠나요?
A. 남편은 착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다행 중 불행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청각언어장애인이었어요. 당시 남편이 양계장에서 일하면서 그 안에서 살고 있었어요. 자그마한 방이었는데 그렇게 남편하고의 첫 날 밤을 보내게 됐죠.
Q. 남편이 청각언어장애인이라고 했는데 의사소통은 어떻게 했나요?
A. 수화로 했어요. 수화는 남편에게 배웠구요. 남편이 5살 때 병으로 말을 못하기 시작했는데 말을 못한지 오래되어서 상대가 말하는 걸 빨리 눈치채요. 그래서 제가 조금만 수화로 표현해도 금방 말을 알아듣곤 해서 의사소통은 오히려 편하고 쉬웠어요.
Q. 중국에 얼마나 있었고 어떤 게 가장 힘들었나요?
A. 중국에는 한 12년 있었어요.(눈물) 제 기억에는 안 힘들었던 때가 없었던 것 같아요. 제일 힘든 걸 꼽으라면 '신분이 없는 것'이었어요. 경찰차나 경찰이 지나가면 (붙잡혀서 북송될까봐) 무섭고 겁이 났어요. 신분을 숨기면서 살아야 하는 처지여서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조심해야 했어요. 일하다가도 무시를 받아도 무조건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라고 해야 했어요. 그게 정말 답답하고 억울해서 혼자 울고 그랬죠. 그래서 '신분이 있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됐어요. 열심히 일해서 중국호적도 사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게 생각처럼 잘 안됐어요.
제가 한번은 우연히 인터넷을 보다가 북한 사람이 한국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결심을 하고 심양 영사관에 갔어요. 그때 영사관에 가기 전에 아들한테 "엄마는 지금 신분이 없어. 엄마가 신분이 있어야 네 옆에 영원히 있어줄 수 있어"라고 이야기하니까 아들이 제가 왜 이러는지를 이해를 해줬어요. 그런데 가는 중에 아들이 저한테 전화를 걸어와서 "엄마, 그냥 보고만 와"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래 알겠어. 보고만 올게"라고 그랬죠. 막상 가보니까 제가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안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한국영사관에는 중국인 공안들이 보초를 어마어마하게 서고 있더라고요. 붙잡힐까봐 겁이나고 떨려서 가까이도 가지도 못하고 먼데서 한바퀴 돌아보고 그 다음날 집으로 왔어요.
● 완전한 자유를 위한 또 한번의 탈출, 그리고 남한에서..
Q. 중국의 한국영사관을 통해서는 탈출을 못했다고 하셨는데요, 그 후로 어떻게 해서 남한으로 올 수 있게 됐는지 설명해줄 수 있나요?
A. 심양 영사관에 다녀와서는 한국행을 단념하고 '그냥 열심히 살아서 돈 많이 모아서 중국호적이나 사자'라고 생각을 했죠. 그런데 우연하게 인터넷으로 한국분을 알게 됐어요. 모르는 분인데 저를 도와주셨어요. 그 분이 저의 구출을 후원해주신 목사님을 연결해주셨고 그분 덕분에 한국까지 들어오게 되었어요.
Q. 한국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나요?
A. 막상 떠나려니 '가는 도중에 잡혀서 아들을 영원히 못보면 어떻게 하지?'하는 두려움이 생겼어요. 떠나기 직전에 아들에게 "엄마가 신분이 생기면 네 옆에 영원히 있어줄 수 있어"라고 이야기해주니까 아들이 좋아하더라구요. 그러고 나서 버스에 올라탔는데 눈물이 많이 났어요. '가다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데...'하는 걱정이 들면서도 '신분을 꼭 가지고 싶다'는 마음에 발걸음을 옮겼죠.
Q. 남한에 언제 오셨나요? 그리고 오셔서 지금까지 가장 좋았던 점이나 힘들었던 점이 있다면요?
A. 작년 10월에요. 아직까지 힘들었던 점은 없는 것 같아요.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에요. 그리고 하나원을 수료하고 나오면서 '이제 중국이 아니라 한국이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신분이 생기니까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얼마 전에 아들을 보기 위해 중국에 다녀 왔는데요. 그 때 도와주신 분들한테 선물을 드리려고 중국에서 장미꽃 차를 사왔어요. 어느 날 저도 한 봉지 마시려고 꽃차를 따뜻한 물에 넣으니까 장미꽃망울이 탁 펴지는 것을 보게 됐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저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제는 한국에 와서 망울을 터트리는 것 같아요. 그때 핸드폰 프로필에 이렇게 글을 올렸어요.
『나도 이제 너처럼 망울을 터트려볼란다』
Q. NGI는 어떻게 만나게 됐나요?
A. 하나원에서 나왔을 때 저를 구출해주신 목사님께서 한번 집에 찾아오셨는데요, 그때 NGI 여자 간사님도 같이 왔어요. 저한테 참 잘해주셨고 든든하고 편했어요. 그때 이후로 언니동생 사이로 가까이 지내고 있어요. NGI 사무실이 저희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종종 찾아가면 항상 가족같이 느껴져요. 저는 외동딸로 자랐는데 NGI에는 언니도 있고 동생도 있고 오빠도 있어서 좋아요. NGI에서 진행하는 기도회도 가고 북한선교아카데미도 참여했는데요. 이상하게NGI 간사님들을 만나고 프로그램을 참여하고 나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아요.
Q. 지현씨는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나요?
A. 제가 한국에 올 수 있도록 도와주셨던 한국 목사님이 제가 중국에 있을 때 전화를 주셨어요..
"여보세요? 저 목사에요, 혹시 목사가 뭔지 아세요?"
"목사요? 제가 목사는 모르는데요.."
"아, 그렇군요. 하나님이라는 분을 믿는 사람이에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오는 길에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하나님께 저희가 무사히 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왔어요. 신기하게도 저한테는 확신이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확실히 도와주신다는.. 무사하게 한국까지 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거든요.
제가 태국으로 들어갈 때 한 선교단체에서 구출한 팀과 함께 이동하게 됐는데요. 그 팀은 3개월간 태국에 머무르면서 성경공부를 하고 한국으로 들어올 예정이었어요. 저는 같이 해도 되고 바로 한국으로 와도 됐어요. 태국에 도착했을 때 선교사 한 분이 차를 몰고 와서 나를 경찰서로 인계를 해주고 그 팀은 어디로 가야한다는 거예요. 혼자 경찰서 간다고 하니까 무서웠어요. 그래서 그 팀과 같이 따라가겠다고 하니까 선교사님이 엄청 기뻐하시더라고요. 그때는 왜 그렇게 기뻐하는지 몰랐는데 후에 알고 보니까 성경공부를 하는 센터였어요. 그런데 공부를 안해도 한국에 올 수 있다는 것을 1주일 후에 알게 됐고 보름 후에 선교사님께 한국으로 바로 가겠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때 선교사님이 "말리는 지는 않지만 지현씨만큼은 공부하고 갔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남아있게 됐죠. 그런데 두 달이 지나서 먼저 가겠다고 또 말했지만 역시 그때도 선교사님의 권유에 거절을 하지 못하고 결국 3개월을 다 채우게 됐어요. 공부하는 과정 중에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믿게 됐고 많이 깨닫게 되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저를 예쁘게 봐주셔서 성경공부를 통해서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 수 있게해주시려고 그 팀과 함께 가게 끔 하셨나봐요.
Q. 하나원에서 교회를 다녔나요?
A. 물론 갔었죠. 북한이탈주민 보호센터에서는 교회가 있어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어요. 예배를 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매우 기뻤구요. 사람들이 성경을 잘 못 찾더라고요. 그때 제가 (이미 공부를 하고 와서) 옆에서 찾는 걸 도와줬어요. 그런 제 모습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더 잘 알고 있다는 생각에 어깨가 많이 으쓱했어요.
Q. 지현씨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요?
A. 하나님은 저한테 인자하시고 너그러운신 분인 것 같아요. 저는 말을 잘 안듣는 딸이에요. 많이 이기적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저를 너그럽게 봐주시고 사랑을 많이 주시는 것 같아요.
Q. 아들이 곧 한국으로 오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아들이 오면 같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것 무엇인가요?
A. 아들과 여행을 가고 싶어요. 제가 신분이 없을 때는 중국에서 기차표도 살 수 없었고 여행도 갈 수 없었어요. 그래서 가장 바랐던 것이 신분이 생기면 기차표를 사서 아들이랑 같이 기차도 타고 여행을 마음대로 가보는 거였어요.
제가 바다를 매우 좋아해요. 중국에서 살던 곳은 바다와 거리가 멀었어요. 아들에게 종종 제 고향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바다에 대해 이야기해줬어요.
"엄마가 예전에 살던 곳에서는 조금만 가면 바다가 있어. 통일되면 엄마 고향에 가서 바다로 놀러가자"라고요. 아들은 아직 바다를 본 적이 없어요. 아들이 오면 꼭 바다가 있는 곳으로 여행을 가고 싶어요.
Q. 앞으로의 계획은?
A. 사업으로 성공하고 싶어요. 그래서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어요.
Q. 기도제목이 있다면 나눠주세요. A. 제가 바라는 기도제목은 빨리 통일되는 것이에요. 남과 북으로 갈라진 이산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편안하게 밥도 먹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어요. 다시는 마음을 아프게하는 이런 비극이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Q. 통일이 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요?
A. 엄마 묘에 가보고 싶어요. 얼마 전에 영화를 봤는데 그 영화를 보면서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어린 아이가 엄마와 즐겁게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방에서 죽어서 누워있는 엄마를 만지는 장면이 나왔는데 그 아이가 꼭 저 같았어요.
엄마가 만성 뇌막염으로 1년동안 병을 앓다가 돌아가셨는데 한국에서는 충분히 치료가 가능한 병이라서 그걸 생각하면 더 가슴이 아파요. 그리고 저처럼 북한에서 그렇게 부모를 잃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더 더욱 하루 빨리 통일이 되길 바라요.
Q. 중국의 한국영사관을 통해서는 탈출을 못했다고 하셨는데요, 그 후로 어떻게 해서 남한으로 올 수 있게 됐는지 설명해줄 수 있나요?
A. 심양 영사관에 다녀와서는 한국행을 단념하고 '그냥 열심히 살아서 돈 많이 모아서 중국호적이나 사자'라고 생각을 했죠. 그런데 우연하게 인터넷으로 한국분을 알게 됐어요. 모르는 분인데 저를 도와주셨어요. 그 분이 저의 구출을 후원해주신 목사님을 연결해주셨고 그분 덕분에 한국까지 들어오게 되었어요.
Q. 한국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나요?
A. 막상 떠나려니 '가는 도중에 잡혀서 아들을 영원히 못보면 어떻게 하지?'하는 두려움이 생겼어요. 떠나기 직전에 아들에게 "엄마가 신분이 생기면 네 옆에 영원히 있어줄 수 있어"라고 이야기해주니까 아들이 좋아하더라구요. 그러고 나서 버스에 올라탔는데 눈물이 많이 났어요. '가다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데...'하는 걱정이 들면서도 '신분을 꼭 가지고 싶다'는 마음에 발걸음을 옮겼죠.
Q. 남한에 언제 오셨나요? 그리고 오셔서 지금까지 가장 좋았던 점이나 힘들었던 점이 있다면요?
A. 작년 10월에요. 아직까지 힘들었던 점은 없는 것 같아요.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에요. 그리고 하나원을 수료하고 나오면서 '이제 중국이 아니라 한국이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신분이 생기니까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얼마 전에 아들을 보기 위해 중국에 다녀 왔는데요. 그 때 도와주신 분들한테 선물을 드리려고 중국에서 장미꽃 차를 사왔어요. 어느 날 저도 한 봉지 마시려고 꽃차를 따뜻한 물에 넣으니까 장미꽃망울이 탁 펴지는 것을 보게 됐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저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제는 한국에 와서 망울을 터트리는 것 같아요. 그때 핸드폰 프로필에 이렇게 글을 올렸어요.
『나도 이제 너처럼 망울을 터트려볼란다』
Q. NGI는 어떻게 만나게 됐나요?
A. 하나원에서 나왔을 때 저를 구출해주신 목사님께서 한번 집에 찾아오셨는데요, 그때 NGI 여자 간사님도 같이 왔어요. 저한테 참 잘해주셨고 든든하고 편했어요. 그때 이후로 언니동생 사이로 가까이 지내고 있어요. NGI 사무실이 저희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종종 찾아가면 항상 가족같이 느껴져요. 저는 외동딸로 자랐는데 NGI에는 언니도 있고 동생도 있고 오빠도 있어서 좋아요. NGI에서 진행하는 기도회도 가고 북한선교아카데미도 참여했는데요. 이상하게NGI 간사님들을 만나고 프로그램을 참여하고 나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아요.
● 하나님을 만나기까지
Q. 지현씨는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나요?
A. 제가 한국에 올 수 있도록 도와주셨던 한국 목사님이 제가 중국에 있을 때 전화를 주셨어요..
"여보세요? 저 목사에요, 혹시 목사가 뭔지 아세요?"
"목사요? 제가 목사는 모르는데요.."
"아, 그렇군요. 하나님이라는 분을 믿는 사람이에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오는 길에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하나님께 저희가 무사히 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왔어요. 신기하게도 저한테는 확신이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확실히 도와주신다는.. 무사하게 한국까지 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거든요.
제가 태국으로 들어갈 때 한 선교단체에서 구출한 팀과 함께 이동하게 됐는데요. 그 팀은 3개월간 태국에 머무르면서 성경공부를 하고 한국으로 들어올 예정이었어요. 저는 같이 해도 되고 바로 한국으로 와도 됐어요. 태국에 도착했을 때 선교사 한 분이 차를 몰고 와서 나를 경찰서로 인계를 해주고 그 팀은 어디로 가야한다는 거예요. 혼자 경찰서 간다고 하니까 무서웠어요. 그래서 그 팀과 같이 따라가겠다고 하니까 선교사님이 엄청 기뻐하시더라고요. 그때는 왜 그렇게 기뻐하는지 몰랐는데 후에 알고 보니까 성경공부를 하는 센터였어요. 그런데 공부를 안해도 한국에 올 수 있다는 것을 1주일 후에 알게 됐고 보름 후에 선교사님께 한국으로 바로 가겠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때 선교사님이 "말리는 지는 않지만 지현씨만큼은 공부하고 갔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남아있게 됐죠. 그런데 두 달이 지나서 먼저 가겠다고 또 말했지만 역시 그때도 선교사님의 권유에 거절을 하지 못하고 결국 3개월을 다 채우게 됐어요. 공부하는 과정 중에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믿게 됐고 많이 깨닫게 되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저를 예쁘게 봐주셔서 성경공부를 통해서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 수 있게해주시려고 그 팀과 함께 가게 끔 하셨나봐요.
Q. 하나원에서 교회를 다녔나요?
A. 물론 갔었죠. 북한이탈주민 보호센터에서는 교회가 있어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어요. 예배를 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매우 기뻤구요. 사람들이 성경을 잘 못 찾더라고요. 그때 제가 (이미 공부를 하고 와서) 옆에서 찾는 걸 도와줬어요. 그런 제 모습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더 잘 알고 있다는 생각에 어깨가 많이 으쓱했어요.
Q. 지현씨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요?
A. 하나님은 저한테 인자하시고 너그러운신 분인 것 같아요. 저는 말을 잘 안듣는 딸이에요. 많이 이기적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저를 너그럽게 봐주시고 사랑을 많이 주시는 것 같아요.
● 앞으로 하고 싶고 바라는 것들, 그리고 통일 염원
Q. 아들이 곧 한국으로 오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아들이 오면 같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것 무엇인가요?
A. 아들과 여행을 가고 싶어요. 제가 신분이 없을 때는 중국에서 기차표도 살 수 없었고 여행도 갈 수 없었어요. 그래서 가장 바랐던 것이 신분이 생기면 기차표를 사서 아들이랑 같이 기차도 타고 여행을 마음대로 가보는 거였어요.
제가 바다를 매우 좋아해요. 중국에서 살던 곳은 바다와 거리가 멀었어요. 아들에게 종종 제 고향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바다에 대해 이야기해줬어요.
"엄마가 예전에 살던 곳에서는 조금만 가면 바다가 있어. 통일되면 엄마 고향에 가서 바다로 놀러가자"라고요. 아들은 아직 바다를 본 적이 없어요. 아들이 오면 꼭 바다가 있는 곳으로 여행을 가고 싶어요.
Q. 앞으로의 계획은?
A. 사업으로 성공하고 싶어요. 그래서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어요.
Q. 기도제목이 있다면 나눠주세요. A. 제가 바라는 기도제목은 빨리 통일되는 것이에요. 남과 북으로 갈라진 이산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편안하게 밥도 먹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어요. 다시는 마음을 아프게하는 이런 비극이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Q. 통일이 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요?
A. 엄마 묘에 가보고 싶어요. 얼마 전에 영화를 봤는데 그 영화를 보면서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어린 아이가 엄마와 즐겁게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방에서 죽어서 누워있는 엄마를 만지는 장면이 나왔는데 그 아이가 꼭 저 같았어요.
엄마가 만성 뇌막염으로 1년동안 병을 앓다가 돌아가셨는데 한국에서는 충분히 치료가 가능한 병이라서 그걸 생각하면 더 가슴이 아파요. 그리고 저처럼 북한에서 그렇게 부모를 잃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더 더욱 하루 빨리 통일이 되길 바라요.